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부키, 2007
내가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이 책이 나왔었다면, 나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에 조금더 자부심과 희망을 가졌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펴낸 책들은 그저 대학교 교재 (아마도 외국의 교과서의 내용을 대부분 가져다가 편집한) 또는 KDI 등의 연구소에서 나온 무미건조하고 그다지 정치하지 못한 연구결과물들과 가끔 신문에 연재한 세평들을 모은 산문집이 대부분이었다 - 돌아가신 정운영 선생님의 세평집에 환호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책은 한국인 경제학자가 전 세계에 주는 선물이며, 경제학자들만의 언어가 아닌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소중한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장하준 교수는 개발경제학자이고 이 책은 개발경제학을 다루고 있다. 경제학 개론 교과서들은 대부분 복잡한 미시이론과 거시이론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할 뿐, 성장이론이나 개발이론은 책 뒤에 이르러 살짝 소개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한국에는 경제학과에 개발경제학을 전공으로 한 교수가 전혀 없는 대학도 많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장하준 교수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에 자신의 재능과 정열을 쏟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쓰여지고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출간된 이책은 사실 한국을 위해 쓰여진 책은 아니다. 여러군데에서 한국에 대한 사례가 등장하긴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이 현재 한국의 경제운용에 크게 도움이 될 부분은 별로 없다. 이 책은 저자의 표현 그대로 '가난한 나라의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노력이고, 이미 한국은 더이상 '가난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자들이 그리고 부자나라들이 어떻게 하면 좀더 잘살게 될 수 있을까를 다룬 것이 아닌, 가난한 나라들이 어떻게 하면 가난을 벗어나 잘 살게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책이다. - 오해하지 마시라: 이 책은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논의이지,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해야 부자가 되는 것인가를 다루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책에서 주장되는 내용을 현재의 한국경제에 대한 조언이라고 "오해"한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라고 하며 비난하는 것은 어린 아기에게 이유식을 조금씩 먹게 해주라는 조언을 어른이 듣고 '나보고 이유식을 먹으라니 미친거 아냐?'라고 화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굳이 이책에서 한국경제에 주는 시사점을 찾으라면, 지금보다 더 부자나라간 된 다음, 한국이 가난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힘을 써주든가 아니면 최소한 그들의 경제발전에 훼방을 놓지 않기를 기대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본 큰 딸은 내게 '아빠, 왜 이런 책을 보세요?'라며 살짝 불만을 표시했다. 책의 제목 때문이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이란 제목은 어찌보면 - 요즘 교회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있는 딸의 입장에서는 - 상당히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란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선한'이란 수식어 없이도 '사마리아인'이란 단어 자체가 이미 선한 사람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기에.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왠지 삐딱하거나 불경스러운 표현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제목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그냥 '부자 나라들'을 말한다. 이에 더하여 부자나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악한 삼총사 - IMF, IBRD (World Bank), WTO 및 부자나라와 사악한 삼총사의 이론적 뒷받침을 해주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도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 표현된다.
나는 처음 이 책을 접하며 제목을 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고 붙였을까 궁금했다. 그냥 '나쁜 넘들'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기들의 못된 과거 행실을 살짝 숨기고 가난한 나라들을 압박하며 어른과 아이의 싸움 또는 체급이 다른 권투 선수들끼리 같은 조건에서 싸우자며 달려드는 그런 나라들은 그냥 '나쁜 넘들'이라고 표현하면 되지 않는 것인가? 이 궁금증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해결할 수 있었다: 가난한 나라들이 잘 살게 되기 위해서는 부자 나라들의 선의가 필요한데 장하준 교수는 부자나라들이 이러한 선의를 베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을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책은 1장에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일반대중을 위한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란 책을 비판하며 시작한다. 이후 2장에서 7장까지는 일반적인 경제학의 주제들 (관세, 자유무역, 외국인 투자, 공기업 민영화, 저작권 및 특허의 보호 그리고 정부의 재정정책) 과 가난한 나라의 경제성장을 다루고 있기에 비교적 쉽게 읽혀졌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시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왜 가난한 나라들에게는 도움이 되지않고 오히려 그들의 경제성장을 저해하는지를 역사적 사실과 사례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8장에서 정치와 경제발전 그리고 9장에서 문화와 경제발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내게는 조금 생소한 분야로 느껴지며 멈칫멈칫하며 읽게 되었다. 특히 8장의 정치와 경제발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아 이 부분만 똑 떼어서 뽑아놓으면, 80년대에 불온서적으로 찍히기 딱 좋겠구나' 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민주주의와 시장 사이에 근본적인 긴장관계가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자유 시장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경제발전을 촉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72 쪽) - '민주주의가....경제발전을 촉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읽히며 순식간에 반민주 인사로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사이에는 강한 긴장이 있으며, 자유시장이 경제 발전을 촉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75쪽) - 자유시장을 통한 경제 발전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읽혀 순식간에 자유시장에 반대하는 사람, 이를 확대해석하여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인사로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무역 자유화로 인한 정부 세입의 감소는...하급 공무원의 사소한 부정부패를 키운다 (276쪽) - 이번에는 무역 자유화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기에, 형님 나라들에 대한 불경죄를 뒤집어 썼을지도 모른다.
이에 더한 결정타로 이책에 딸린 주석의 한 부분은 '한국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의 경제 기적을 주도한 박정희 장군은....공산주의자였다' 라고 언급하고 있기에 천기누설의 죄를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2009년 국방부에서 이 책을 불온서적 목록에 포함시킨 것은 어찌보면 나름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담은 책이 출판되고 또 잘 팔려나가는 (2007년 조선일보 선정 베스트셀러에 포함이 되기도 했다고) 한국 사회는 이제 정말 더 이상 가난한 나라는 아니지 않은가.
점차 성숙해져가는 한국사회에서 이 책을 읽고 자극을 받은 좋은 경제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경제학과 세계경제에 기여를 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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